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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의 역사에 대해서...(2)
작성자관리자 | 등록일2009.10.27 11:17 | 조회수5364
셋째로 스코틀랜드의 양치기 소년들이 양떼를 돌보면서 스틱으로 돌을 쳐서 들토끼의 구멍에 넣으며 즐기던 것이 골프의 시초됐다는 설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여러가지 사실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든다.
하지만 이 스코틀랜드 양치기 소년들의 골프설도 그 정확한 근거를 찾아 보기 힘들다.
그러므로 현재로선 유럽대륙에 있던 골프와 유사한 놀이가 스코틀랜드에서 독자적으로 육성되었다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
여하튼 골프의 기원은 확실히 어느 나라인지 모르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골프가 스코틀랜드 지방에서 꾸준히 발전돼 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스코틀랜드 골프 융성설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골프(Golf)'란 스코틀랜드의 오래된 언어로 '치다'인 '고프(Gouft)'가 그 어원이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지방의 지형이 골프장으로는 적격이었다.
스코틀랜드 북방쪽 해안에는 링크스(Links)라고 불리는 기복이 많은 초원이 있었다.
멋진 잔디와 잡목이 우거진 작은 언덕으로 이어진 지형은 골프코스로 하기에 적합했다.
더우기 이곳은 공유지여서 서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한편 이 당시 들토끼가 많이 서식해 그들이 잔디를 깎아 먹어 평탄하게 된 곳을 그린(Green)이라고 불렀고, 그린과 그린을 연결하는, 양떼들이 밟아 평탄해진 넓은 길을 페어웨이(Fair way)라고 불렀다.
이 때의 그린이 바로 오늘날 퍼팅그린이 됐고, 양떼의 길은 페어웨이가 됐다.
'페어웨이'란 항해용어로 '바다의 안전한 길', 즉 '바위 사이의 안전한 항로'라는 뜻이다.
이처럼 골프의 안전한 플레이 지대에 항해용어를 인용한 사실로 미뤄보아 해상무역과 골프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클럽, 즉 롱노이즈 등을 만드는데 쓰이는 재료인 나목들이 스코틀랜드 지방에서 생산되었다는 점도 스코틀랜드 골프 융성설의 증거가 되고 있다.
스코틀랜드에 러시아나 캐나다에서 히코리목이 수입돼 클럽의 샤프트로 쓰였으며 높은 가공기술을 보유한 클럽제조 직공들도 많이 나왔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 교전상태에 있어 활 등 무기를 만드는 직공들이 골프클럽도 만들어 많은 부수입을 올렸다고 한다.
한편 이들은 클럽의 헤드에 무게를 더하기 위해 납을 넣는 기술을 개발했다.
또 볼을 맞히는 클럽헤드의 페이스면을 보호하기 위해 양의 뿔을 깎아 만든 인서트를 끼웠다고 한다.
이러한 목동들의 놀이는 처음에는 서민들의 놀이로 성행했다가 골프금지령이 내려진 후로는 서민들이 할 수 없으므로 자연히 특권층인 왕족만이 할 수 있게 돼 오히려 나중에는 아예 궁중안으로 들어가 왕족들의 경기로 바뀌게 됐다.
여러 차례 금지령과 해제의 과정을 거듭하다가 국민의 권리가 점차 인정되면서 서민도 골프를 즐길 수 있게 됐는데 가장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한 사람은 스코틀랜드의 왕인 제임스 4세로서 1520년에 퍼스(perth)에 활 제작자에게 골프채 한세트와 공을 구입해 골프를 하게 된 것이다.
한편 1567년에는 스코틀랜드 메리여왕이 그녀의 남편인 찰리경이 죽자마자 시튼하우스에서 골프를 해 세상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리고 1592년 당시 리스(leith)에서는 일요일에 골프를 하는 것이 금지됐슴에도 불구하고 세인트앤드류스의 대주교는 지역주민에게 일요일에 골프를 하는 것을 허락하기도 했다.
영국에서는 17세기에 스코틀랜드 왕인 제임스 6세가 영국의 왕 제임스 1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런던 근교인 블랙 히스(black heath)로 그의 신하들과 같이 갈 때까지는 골프에 대한 기록이 없었다.
그 후 빈센트 광장의 웨스트민스터 학교의 운동장이 된 터틀 필드(tuttle field)에서 골프경기가 열렸다고 한다.
이 터틀 필드는 학생들에게 업 필드(up field)라고 불려졌다.
이곳은 정규코스와 다르고 경기방식도 현재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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